Christian Review 2014.03 - page 33

그 사람들에게 지도력을 갖게 하여 리더의 역할을 수
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이 보람된 일이었다고 생각합니
다. 이일을통해서다른봉사단체들이많이생겼어요.
그래서저는독창적인것보다는독주하는것보다는함
께일을하는것이몸에밴것같아요. 사실어떤일을
할 때 나만, 우리만 하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과 함
께일을하는것, 그게연합교회의또하나의정신이기
도합니다.”
그녀는 아일랜드 사람으로 가톨릭 선교사였던 브랜
든 케네디와 결혼하여 두 딸, 시내(21. 멜번 RMIT 대
학 재학)와 이타(17. 라벤스우드여고 재학)를 두었다.
하지만 선교사로서 왕성한 삶을 살던 남편은 2011년
말 갑작스럽게 뇌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러기에 박
목사는 어머니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배후
자를잃은슬픔이어떤것인지안다. 캔버라에서교회
홀을 개조하여 겨울에 집 없는 사람들이 따뜻하게 잠
을잘수있도록공간을마련해준그녀다.
어려서부터 맺어진 호주와의 인연
박 목사가 태어난 곳은 부산이다. 더 정확히 말하자
면부산에있는일신기독병원인데이병원은호주선교
사가세운병원이다. 그래서호주와그녀의인연은이
렇게남달랐다.
“어머니는 철저한 불교 신자였어요. 그런데 일곱 형
제를낳으면서일신병원신세를지셨는데헬렌맥켄지
선교사가 저를 받으셨대요. 저도 이런 사실을 몰랐었
죠. 이곳에 와서 신학공부를 하면서 일신병원이 호주
교회가세웠다는걸알았어요.
그런 후 어머니에게 일신병원이 호주교회에서 세운
병원이라고 말씀드렸을 때 어머니께서는 이제야 빚을
갚는구나,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몸이 약하셨던 어머
니가 일신병원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나 봐요. 선교사
들이 불쌍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기 위해
서세운병원이었고그래서그소식을듣고도움을많
이 받았는데 어머님이 늘 그 고마움을 기억하고 계셨
던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그 이야기를 드렸을 때 어
머님이 이제야 네가 빚을 갚는구나, 그렇게 말씀하시
면서 내가 그 병원에서 많은 자식을 낳았으니까 하나
쯤은호주로보내도되지않겠느냐그렇게말씀하시더
라고요.
어머니는철저한불교신자이셨지만이렇게열린마
음을갖고계셨어요. 이곳에몇번오셨다가셨는데주
일마다꼭예배에참석하셨어요. 맨뒤에앉으셔서저
는 졸았다고 생각하는데 어머니는 기도드리셨대요.
그러시면서 네가 영어로 설교하니까 어떻게 알아들을
수가있느냐, 그래서기도했다그러시더라고요.
어머니는 2008년 돌아가셨어요. 돌아가시기 전에
세례를 받으셔야 하는데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그래
서몇번교회나가시라고권유를했어요. 그럴때마다
‘내가목사를낳은엄마가아니냐. 내가만약자리에서
일어나 교회를 간다면 내 딸이 세례를 줄 수 있겠지?’
그러셨어요. 그런데 내가 아일랜드에 다녀오는 중에
돌아가셨어요. 그런데 들어보니까 어머님이 돌아가시
기전에세례를받으셨다고그래요.”
그녀는걸려온전화를받고나서말을이었다.
“오래전 일인데요. 한국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는데
일신병원 바바라 마틴 선생님이 저를 초대했어요. 당
신은이제호주목사니까우리병원에와서설교를해
달라는거였죠. 이병원에서태어난사람이이곳에와
서 설교를 하는 것은 기막힌 인연이라며 내가 태어난
출생기록카드를보여주셨어요.”
소녀의 꿈은 군인이었다.
“절도있는군인이멋져보이고유니폼을좋아했어요.
그래서군인이되고자했는데고등학교때부터는탐사
하고 옛것을 찾는데 관심을 많이 가졌습니다. 그러다
가대학에서는특수교육학을했는데나중에보니까저
희집안이유전적인것같아요. 선조때부터학교도세
우고, 교육자집안이셨어요. 저희형제들도모두교수
이고 교사입니다. 저도 자연스럽게 교사 쪽으로 생각
을가지게된것같아요. 그리고장애자학교에서일을
할 때도‘어이구, 어려워서 어떡하나’그런 마음은 전
혀없었거든요.”
박목사가예수를영접한것은대학시절이다. 기독학
교인이화여자대학교에입학한그녀에게아버지는“교
어린시절군인꿈꿨지만,
이젠호주연합교회
리더
크리스찬리뷰
33
80
Christian Review
▲죠지스리버
노회 초문화 목
회 사역자로 취
임한 박명화 목
사와 듀류리 노
회장(91. 9.27)
1...,23,24,25,26,27,28,29,30,31,32 34,35,36,37,38,39,40,41,42,43,...92
Powered by MOAZ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