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hristian Review
오랜 격리 기간으로 인해서 손해 배상을 해야 하는 일 이 벌어지자, 1837년 10월 빠른 검역을 위하여 시설을 보완하고 확충하였고 다음 해 5월에 완공하였다. 해변은 승객과 짐을 상륙하여 통과하는 곳, 산 쪽은 두 곳으로 분리하여 해변이 보이는 쪽은 건강한 사람, 반대쪽인 남쪽 비치가 가까운 언덕에는환자를 배치하 였다. 건강한 사람들을 위하여 4개의 목조 집이 있는 데 한 집의 수용 능력은 25명이었다. 근처에 환자 32명을 수용할 수 있는 병원을 지었다. 감역 지역은 12 혹은 13개의 원추모양의 돌에 의하여 구분이 되었다. 두 지역 사이에는 군인들이 경비를 섰 고, 격리된 사람들은 돌 선을 넘어서는 안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설은 턱없이 부족하였다. 1838 년 한 해에만 이민선 5척이 격리되면서 수용 인원이 차 고 넘치자 영국 정부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였다. 1838년 말부터 모든 이민자들은 반드시 건강진단을 받고, 천연두 백신을 맞아야 한다는 법을 공포하였다. 법이 실행되고 검역소의 일은 현저하게 줄었다. 1840년 1840년 죄수수송선이 더 이상오지않았다. 식민지의 경제 불황은 1841년 말부터 1847년까지 이어졌다. 이 기간 동안 검역소는 거의 폐쇄된 상태였다. 1853년 1월 문제의 Beejapore호가 입항하면서 활동이 재개되었다. 2층인 배는 항해 중 홍역과 성홍열로 56명이 죽었고, 도착 후 검역소에서 62명이 죽었다. 1천여 명의 승객은 90여 개의 텐트에 나누어서 배치되었다. 숙식과 의료 시설이 턱없이 부족하자 검역소는 대대적으로 시설을 확충하게 되었다. 이때 제2의 묘지가 개발되었다. 증기선이 발명되어 호주까지의 항해 시간이 짧아지면 서, 사회적으로 영향력있는 사람들이 호주로 이민 오게 되었다. 검역소에는 사회적 계급의 구분이 없었지만, 1 등석 승객들의 항의로 정부에서는 1873년부터 1876년 까지 1등석 승객을 위한 숙소를 따로 마련하였다. 1881-1882년 천연두가 성행할 때는 천연두에 걸린 시드니 주민 104명을 수용하기도 했다. 열악한 시설로 인하여 올바른 치료가 이루어지지 않자, 1882년 1월 보건당국에서는 ‘건강위원회’(The Board of Health) 를 설치하여 격리를 포함한 다양한 책임을 맡게 하였 다. 이때 1881년에 제3의 묘지가 개발되었다. 1901년 1901년 호주 연방정부가 탄생하면서 검역과 이민 등 커·버·스·토·리 노스헤드검역소(North Head Quarantine Station) 크리스찬리뷰 33 22 Christian Review ▲QStation박물 관에전시중인각 종의료욤품과생 활용품들. ▲부두와인접한검역소에도착한승객들은입소를위해건강검진을 받고소독(샤워) 과정을거쳐야한다.(왼쪽에서오른쪽으로)
Made with FlippingBook
RkJQdWJsaXNoZXIy NTUxNzI=